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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함께 투입된 잇쵸 멤버들

 

곤로 : 토모키군    만나까 : 노리꼬상   오쿠 : 카나메군   

웨이트레스 & 캐쉬어 : 아미    신입 : JUN

 

 

아미

 

 

아미짱은 내가 잇쵸에 첫 출근했을 때 함박꽃같이 활짝 웃으며 날 맞이해주었다.  

똑소리나는 21세 대학생으로 방송PD 지망생이었다.  보스톤에 있는 대학의 방송컴뮤니케이션관련 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출신으로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일본인치고는 인정이 있고 순박했다.   일도 야무지게 잘하고 나이에 비해 책임감도 아주 강해 주인장의 총애와 동료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아주 예쁘고 귀여운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의외로 미국 유학기간내내  일본인 남자친구를 갈아치우며 동거중이었다.   앞으로의 꿈은 미국에서 방송미디어관련 공부를 마친 후 일본엔터테인먼트회사에 입사해 실력을 인정받는 프로듀서가 되는것이다.   취미는 가라오케가기.




카나메




카나메군은 도쿄출신으로 전형적인 20살의 일본남자이다.   고등학교 막 졸업하자마자 미국유학을 왔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혈기왕성한 만큼 돌발적인 발설과 예측불허의 행동으로 잇쵸의 괴짜로 통했다.   꿈은 돈많이 버는 사업가지만 구체적으로 아직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른다. 일단은 영어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부모가 보내서 미국에 왔다.  

 

미국 땅에 도착한지 1년이 넘었으나 아직 영어는 잘 안되고 해서 주로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일본친구와 놀거나 일본식당에서 일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약간 나를 어려워했지만  내 교육을 맡으면서 곧 친해져서 나에게 일본의 성문화(?)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노리꼬


오늘 만나까를 맡은 노리꼬상은 30살의 가정주부였다.  어학연수로 미국에 왔다가 백인남자를 만나 결혼에 꼴인,  남자아이 1명을 낳았다.   아줌마의 억척스러움을 가지고 있어서 궂은 일도 마다않고 먼저 나서서 하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약간 수다스러운 면도 있어서 분위기 메이커였다.   잇쵸에서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잇쵸일이 워낙 고되다보니까 예쁜 여자아이보다는 자기 몫이상 일을 척척 해내고 분위기도 밝게 띄울 수 있는 사람이 인기있는 것은 당연했다.

 

간혹 남편이 아이와 함께 잇쵸에 와서 노리꼬상을 데리고 가곤 했다.  155cm 정도의 노리꼬와 190cm 인 그녀의 남편이 함께 걸을 땐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부부를 볼 때마다 노리꼬상이 그다지 뚱뚱한 편은 아닌 데도  자꾸 옛날 채플린의 흑백영화시절 자주 등장했던 홀쭉이와 뚱뚱이가 떠올랐다.


그녀는 틈이 나면 나에게도 이것 저것 한국에 대해 물어보거나,  일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며 때론 자기 시부모 흉을 보기도 했다.^^

 

 

토모키


곤로를 맡은 토모키군은 잇쵸에서는 현재 최고 베테랑으로 통한다.  

지금까지 2년 반동안 잇쵸에서 일해왔다. 아츠시상의 신임을 단단히 얻고 있다.   26세인 나이에 비해서 매우 성숙한 편이어서 왠만해서는 화를 내거나 놀라거나 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늘 사람좋은 미소와 여유있는 모습으로 잇쵸의 일을 리드해 나갔다.

 

그는 보기드물게 외국에 파견된 일본 대기업 지사장을 아버지로 두어서 말레이지아에서 자랐다.  ,고등학교과정을 말레이지아 국제학교에서 이수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래서 그런지 전형적인 일본인스타일은 아니었고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다니고 있었던 음악학교를 이미 졸업하고 보스톤에서 체류하면서 일본음악계 데뷔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 곧 등장할 가수지망생인 히로꼬상과 콤비가 되어 데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일본의 유명 작곡가가 되는 것.   악기는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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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문화를 공부하려고 할 때에 그 나라 유적지를 본다던가, 그 나라관련 책을 읽는다던가 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 나라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생활하는 것을 제일 으뜸으로 친다.

 

따라서 어떤 나라에 여행을 간다 해도 그 나라에 유적지에서 사진을 찍는다든지 하는 것보다 가능한 그 나라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곳 혹은 시장골목, 번화가 등 사람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가서 현지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편이다. 

 

처음 만났어도 적극적으로 다가가 나를 소개하고 가능하면 그 들과 술마시고 함께 이야기하고 사진찍고 하는 것을 즐긴다.    만약, 라틴계나라에 가면 그 나라 유적지보다는 차라리 살사바에 가서 그들과 함께 춤추고 술마시고 이야기할 것이다.

 

지금의 그 사람은 몇 백년의 그 나라 역사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문화의 응축된 결과물이다.  생각, , 행동, 심지어 외모에서까지 그 민족, 나라의 모든 것이 스며들어 있다.

 

나는 잇쵸에서 일하면서 50명에 가까운 일본인을 만났다.  그 들을 통해서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들의 각양각색 인생스토리를 묵과하기에는 일본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에 잇쵸 멤버들을 소개할까 한다.  워낙 많기에 일단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가즈오

잇쵸를 내게 소개해주었던 가즈오는 내가 미국유학시절을 통틀어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다.  

오사카출신으로 원래는 전산관련회사에서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러다 뒤늦게 재즈에 빠져 퇴근 후 음악학원에 다니며 더블베이스 (재즈)를 배웠다.   그 후 밤에 재즈클럽에서 재즈베이시스트로 활용하다가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왔다.

 

나와는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만났다.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오사카출신답게 잔정이 많고 낙천적인 친구여서 매우 친했다. 

 

가끔 이 친구는 나를 초대해서 자기 특기인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곤 했다.  내 유학생활은 학교공부와 잇쵸 아르바이트 일색이어서 무척 빡빡했다.   짬짬히 그와 함께 전설의 재즈아티스트 공연을 보러가거나 그가 만든 스파게티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며 음악이야기를 하곤 했다.  특히, 칙칙하지만 그와 함께 당시 대히트쳤던 영화타이타닉을 본 기억이 새롭다.  



타이타닉이 가라앉는 장면에서 악사들이 탈출할 생각을 하지않고 계속 음악을 연주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씬이 나온다.

 

그 때 누가 볼새라 찔끔 흘린 눈물을 닦던  가즈오의 옆모습이 아직 눈가에 생생하다.

 


 


주인장 아츠시상


주인장인 아츠시상은 대학 캠퍼스커플이었던 코코상과 결혼해서 20대중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왔다
.    

원래는 건축가지망생으로 공부를 하기위해 왔지만 차츰 마음이 바뀌어 부모에게서
지원받은 돈으로 잇쵸를 차렸다
.  

 

잇쵸가 비교적 장사가 잘 되어서 넓은 정원이 딸린 근사한 저택도 구입하고 고가의 차도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와인마니아여서 집 지하창고에는 와인저장소를 만들어놓고 가끔 와인파티를 즐긴다.   

 

잇쵸멤버들도 초대해서 단 한 번 그의 집에서 파티를 한 적이 있는데 가보고 약간은
놀랬었다
.

그는 그저 보스톤에 있는 작은 식당의 주인에 불과했지만,  그의 저택은 실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근사한 포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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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호기심이 일었다.    새로운 아르바이트처를 찾고 있던 터라 일단 가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가즈오와 함께 그 식당이 있는 전쳘역으로 갔다. 그 곳은 내 학교로부터 30분가량 떨어져있었다.  

 

Boston 의 중심으로 볼수 있는 Cambridge 시에 속해있었고 하버드와 MIT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역이었다.  (참고로 우리 학교에서 찰스강 다리하나 건너면 MIT가 있다)




보스톤에 있는 지하철 MBTA .  보스톤 시내 왠만한 곳이면 이 전철로 다 갈 수 있었다.  

서울 지하철에 비교한다면 마치 장난감처럼 느껴질 정도로 귀엽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
좀 더 사람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




역에서 내려서 2분정도 걸어가니 왠 빌딩이 나온다

현관을 통과해 들어가니 아니 이건 뭐야~~ 사방에서 일본말이 들린다.   연이어 내 눈에 익숙한 스타일의
다양한 샵들과 가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미국안에 작은 일본에 온 것처럼 1층에는 일본관련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재패니즈 타운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렬로 좍 늘어선 일본식당가와 일본비디오 대여점, 일본식 생선가게, 일본식 채소가게, 일본 옷가게 등 분야별로 다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학2학년때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처럼  신기하게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가즈오를 따라 일본식당가안으로 들어갔다.   가즈오가 일하는 식당은 맨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이었는데 벅적대는 손님들과 커다랗게 울려퍼지는 주문, 몇 명이 파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약간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좁은 공간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주방안에서 손발이 착착맞게 움직이는 두명의 남자와 만들어진 음식이 나오기가 무섭게 재빠르게 손님의 테이블로 나르고 있는 20대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와의 호흡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이윽고, 운동모자를 쓰고 있는 30대후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이 식당 주인장이었다.

 

가즈오군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뒤쪽 비어있는 테이블에 안내하더니 앉아서 이것 저것 설명해준다.  

 

주인장은 일하는 시간대, 등급별 페이수준, 지켜야 할 수칙 등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 적혀져있는 프린터를 주면서 일본인 특유의 깔끔한 말투로 꼼꼼히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아무래도 내가 일본인이 아닌 것을 의식하는 눈치다.  나는 주인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머리속에 어느 새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이미 결심이 선 것이다. 

 

언제부터 나올 수 있겠어요?”  “다음 주부터 나오겠습니다”  나는 차이나타운의 식당일을 정리해야 했으므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곤 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라며 뭘 먹겠냐고 물어본다.  적당히 주세요하니까 안에서 일하던 남자중 한 친구가 금새 가츠돈을 만들어 주었다.  정말 맛있었다.    앞으로 이 음식을 내가 만들거라고 생각하니 묘한 호기심과 신선한 기분이 고개를 들었다.

 

전에 일했던 두 식당과는 비교가 안되게 파닥파닥 뛰는 생선처럼 활기가 넘치는 그 일본식당이 왠지 모르게 강하게 끌렸다.


 

나는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력보다 육감적인 감각의 판단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그 때 그 순간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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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에 5월말에 도착해서 6월의 여름학기부터 수업을 들어가게 되었다.   8년 간이라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얻은 기회였다.    단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토록 어려웠을까? 

나는 그 동안 타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를 모두 버리고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내 온연한 선택에 의해서
첫 발을 내딛는 나 만의 길..     그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아닌지 지금은 모른다. 
하지만, 그 것은 별 중요하지 않다.     

존재지워지는 가  내 스스로 존재하는 가  

세상을 사는  이 2가지 방식에서 적어도 난 스스로 선택한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날을 기념으로 난 내 이름을 새로 짓기로 했다.    준(JUN) 이라고 명명했다.

원하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6월(June)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일본, 미국 모두 다 존재하는 이름이라는 국제적 통용성이었다.



그 후 1년 반동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연습실안 피아노 한대와 그 앞에 앉아있는 나,  그리고 아침에 보는

 하늘과 밤늦게 보는 하늘 이 것이 다였다.  

 

 

그동안 맺힌 것을 한풀이 하듯이 원없이 피아노만 처댔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20대 초반에 거의 프로수준에 오른 친구들이 수두룩한 이 음악학교에서 30살에 가까운 다 늦은 나이에 죽을둥 살둥 열심히 한다는 것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내 피아노실력이란 그들에겐 새발의 피의 피만도

못한 것임에는 삼척동자도 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 순간을 너무 사랑했고 또 감사했다.  내가 진정 하고 싶어하는 것을 8년에 가까운 반대의

세월을 인내하고  비로소 시작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난 죽을 때 눈뜨고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만큼은

안하게 된 것이다.

 

 

피아노연습실에서 또 강의실에서 그렇게 나는 꿈과 같이 음악에만 푹빠져 1년 반을 지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미셀 카밀로(Michel Camilo).   그는 쿠바출신으로 미국에서 테크닉과 예술적 감성 거의 전 부분에서 완벽한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라틴리듬을 근간으로 한 그의 음악은 에너지 그 자체이다!!


 

전 세계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이 곳에 모여든 학생들,   학교 로비에 있다보면  정말 인종의 도가니를

느끼게 할 만큼 다양한 나라, 다양한 민족온갖 인종들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영어가 아닌 음악이란 또

다른 위대한 언어로 왕성하고도 치열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다.  또 나는 일어가 가능했기에 일본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 들과 함께 연습하고

공부하고 때로는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유명뮤지션의 공연도 서울 시내의 영화를 보러가듯, 값싸게

보러가면서 꿈결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꽤 벌어갔다고 생각했던 자금도 1년이 넘어갈 때쯤 거덜이 나기시작했다. 보스톤이 워낙 물가가

비싸고 학교 학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버는 돈은 전혀 없었고.. 

 

게다가 기고만장했던 한국에 벼락 같은 찬물을 끼얹었던 그 이름하여 IMF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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